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르만 괴링 (문단 편집) == 기타 == * 러시아에서는 "게르만 게린크"(Герман Геринг)라고 불린다. 독일어의 'H'가 러시아어에서 'Х'(kh)가 아닌 'Г'(g)로 전사된 것은 러시아어 특유의 오래된 관행 때문이지만[* 원래 러시아어에는 [h\] 발음이 없다. 흔히 'ㅎ'으로 전사되는 글자는 Х로 이 글자의 발음은 [x\]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h\] 발음은 [g\] 보다는 [x\]에 가깝게 들리지만, 전통적으로 슬라브어 화자들은 [h\]를 Х보다는 Г에 가까운 발음이라고 인식해 왔기에 [h\]는 러시아어에서 'Г'로 정착되었다. 그래서 이름 한니발(Hannibal)은 러시아에서 간니발(Ганнибал)이 되었고 그리스어 헤로스(ἥρως)는 라틴어 헤로스(hērōs)를 거쳐 러시아어에서 게로이(герой)가 되었다. 현재는 어지간해서는 Х로 전사하는 관행이 자리잡긴 했는데, 여전히 독일계 고유명사의 경우 Г를 고집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독일어 ö가 러시아어 ё가 아닌 단순히 е로 전사된 것은 특이한 부분이다.[* 독일어 ö는 [ø\]로 발음하는데 이 발음 또한 러시아어에는 없다. 러시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글자를 [jo\]로 발음하는 ё로 음차한다. (예: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 쿄니크스베르크(Кёнигсберг) 그런데 소련 초기 및 스탈린 시절은 ё를 사용하는 것이 반쯤 강제되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괴링의 경우는 교린그(Гёринг)가 아닌 게린그(Геринг)라는 표기로 정착되었고, [[파울 요제프 괴벨스]] 또한 교벨스가 아닌 게벨스(Пауль Йозеф Геббельс)로 자리잡았다.] * 괴링은 워낙 마약에 찌들어 있어서 항상 제정신이 아니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나치 독일의 인사들과 척을 진 상태였다. [[요제프 괴벨스]]의 일기에서도 괴링을 언급할 때마다 별의별 욕이 다 튀어나오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또한 [[알베르트 슈페어]]나 [[카를 되니츠]], [[에리히 레더]] 등 대다수와도 사이가 나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사이가 나빴던 사람은 바로 [[마르틴 보어만]]이였다. 마르틴 보어만과 괴링은 거진 원수 관계여서 서로 죽이지 못해서 안달 난 사이였다. 괴링은 "보어만은 내 불구대천치 원수다. 보어만은 나를 죽이려고 목 빠지게 고대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고,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장에서도 "내가 총통이 되었다면 보어만을 죽여버렸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사실 마르틴 보어만은 히틀러가 그저 끄덕끄덕이거나 좋아라고 말만 했다 하면 그걸 본인이 수십 장의 문서로 만들고, 그러면서 [[정적#s-2|정적]]의 행적을 히틀러의 망상에 맞추어 해석, 가공 및 예전 행적을 양념 쳐서 파묻어버리는 것 때문에 나치당 인사들은 물론이고 국방군과 행정부처의 모두가 [[증오]]했다. 거기에 히틀러 집무실의 여비서들을 시도 때도 없이 성적으로 건드려서 모든 이들이 역겨워했다.][* 실제로 괴링은 밑에서 전공을 부풀려 보고하는 탓에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말아먹은 전력이 있다. 때문에 보어만의 간신 같은 행태에는 넌더리가 날 수 밖에 없었을 것.] 그나마 사이가 가장 좋은 상대는 [[하인리히 힘러]]였다.[* 힘러는 사교적이지 못했으나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이들은 깍듯이 대했다. 힘러는 특히 사석에서 괴링을 선배님이라고 칭하며 예의를 지켰고(아마 괴링이 스스로 조직한 [[게슈타포]]를 [[장검의 밤]] 직전에 힘러에게 넘겼고, 바로 그 게슈타포가 힘러의 영향력 증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고마워하는 감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괴링 또한 힘러 편을 들어주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보어만이 힘러의 군사적 재능 부재를 비난했을 때도 괴링은 '당신이라면 그 정도는 했겠느냐.'고 보어만에게 일갈했다.][* 실제로 보어만은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 입대한 인물인데다가 그나마도 전투병이 아닌 장교 당변병이라 전투에는 한 번도 참여하지 못하고 종전을 맞았다.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못했다는 사정은 힘러도 다를 게 없었으나, 최소한 힘러는 사관후보생으로 고급 지식 및 지휘 과정 교육을 받았으니 재능이라면 모를까 확실히 군사적 지식에 있어서 보어만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진 않았다. 괴링이야 1차 대전에 육군 항공대 소속 장교로 직접 참전해 에이스 자격을 획득한 우수 파일럿이었으니 이 쪽에서야 더 말할 바 없고.] > 괴링이 왔다. '''늙어 처먹은 놈'''. 그는 장군이 되려고 한다. 왜, 원수가 되려 하지 않고. 괴링은 터무니없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모든 사람들을 매정하게 대한다. 이 쓸모없는 뚱보가 빨리 떠나기를 바란다.''' >---- >- [[파울 요제프 괴벨스]], 1933년 일기 중에서 * 나치 핵심 인사긴 하지만, 다른 핵심 인물들과는 달리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으며,[* 물론 살려주는 대가로 전재산을 조공으로 탈탈 털어가기는 했다. 1차 대전 전우였던 프리츠 베크하르트의 경우도 자신이 직접 게슈타포와 친위대를 갈궈서 수용소에서 빼냈다.] 그의 대부인 에펜슈타인 백작이 유대계이기도 해서 유대계 지인들이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방군 장성들과는 달리 신사적인 면도 있었는데, [[공군 야전사단|휘하 지상부대]]에게는 잔혹행위를 엄격히 금지시키기도 했다.[* 그 외에도 갈란트와의 대화에서 "탈출한 적 조종사를 사살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묻고 갈란트가 "내 모든 권한을 이용해서 그 명령을 정지시키겠습니다."고 답하자 괴링이 "그것이 바로 내가 듣고 싶던 대답이었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독일 군대가 소련을 침략하면서 정책적으로 엄청난 잔혹행위를 한 것과 꽤 대조적인데, 실제 독일군에게 학살당한 소련 민간인은 2,000만 명이 넘는다. 이것은 후일 소련군이 독일령으로 진주하면서 민간인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물론 소련은 이런 병사들의 일탈 행위를 금지시켰고, 이를 어기면 엄격히 처벌했으니 감히 나치 따위와는 비교할래야 비교할수가 없다. 소련은 최소한 제네바 협약은 어느 정도 준수했다.] 또한 젊은 시절부터 사교계의 총아였음에도 불구하고 키작은 단신에다 말라깽이에 절름발이인 괴벨스조차 여러 [[여자]]들과 바람을 피운 데 반해 단 한 번의 여성 스캔들도 없이 가족에게 매우 충실한 면모도 보이는 등 사생활적인 면에서만큼은 신사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자살]]하기 직전에 동생 [[알베르트 괴링]]과 단 한번 면회 할 수 있었는데, 이때 동생에게 남긴 말이 가족을 부탁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가히 나치스의 '''[[아이돌]]'''로서 정권의 인기도에 크게 기여했다. 군 내부에서도 병사들이 그를 친근하게 '헤르만'이라고만 부르면서 히틀러가 괴링을 더 신뢰했으면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등 악마적 인물, 썩어빠진 심복이라고 씹히던 힘러, 라이, 보어만 등과 달리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뉘른베르크에서도 연합군 장교들과도 친해질 정도의 사교성을 보였다. 스스로도 "최후의 르네상스인"이라고 주장했고,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도 "50년 혹은 60년 뒤면 독일 전역에 나의 동상이 있을 것이다!"이라고 예언했다가 약간 머뭇거린 뒤, "아마 동상은 없을지 모르나, 내 초상화는 집집마다 걸려있을 것이다!"[[http://eggy.egloos.com/1901670|#]]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뤄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대리석 석관에 우리의 뼈를 담아줄 거다'란 정신 못 차린 말도 지껄였다. 물론 대리석 석관도 없고 '''뼈도 못 추렸다'''[* 자살 후의 사체는 혹시라도 나치 추종자의 성지가 될까 우려되어 다른 인물들과 섞여서 독일 내 모처에서 화장하고 이자르 강의 콘벤츠 지류에 뿌려졌다.]. 현재도 독일에서 나치의 상징이나 히틀러나 나치 고관들의 사진을 걸어놓으면 법적으로 처벌된다. 50~60년 후 [[인터넷]]이 생기면서 어느 정도 걸리긴 했다만 말이다. 실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시 괴링은 [[홀로코스트]]에 관한 한 자신은 전혀 몰랐으며 책임이 없고, 기껏해야 유태인을 '''해외 추방'''하는 정도로만 알았다고 강변했다.[* 자기가 사인한 구체적인 문서나 연합국 측의 비디오 자료 제출로 [[데꿀멍]]하기 전에 "500만 이상의 인원을 죽이는 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했다.][* 수정주의 역사가 데이빗 어빙은 이 설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게다가 해외에서 독일로 못 돌아온 유대계 독일인들도 해외추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소위 '''[[홀로코스트|유태인에 대한 최종해결(절멸 계획)]]'''로 유명해진 "[[반제 회의]](The Wannsee Conference)"의 의장이자 게토와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그 직위에 임명한 이가 바로 괴링이었다. 사실 비단 괴링 뿐만 아니라 재판정에 선 많은 많은 나치 고관들은 대부분 본인들은 유대인 학살을 몰랐다고 주장했고, 이를 모두 SS나 그 총수인 힘러에게 [[책임전가]]했다. 정작 힘러 또한 살아생전 "나는 유대인들을 다 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괴벨스 그 인간이 과격해서 그랬다."고 궁시렁거리고 다녔었다고 한다. ~~괴벨스는 뭐라 했을까~~ * 1차 대전 당시 전우였던 유태인을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탈출시켜 주거나 유태계 귀족이나 사교계 지인들을 보호해주긴 했지만, 대신에 그들은 가진 재산을 거지반 다 괴링에게 바치고 맨주먹만 남은 채로 [[독일]]을 등져야 했다. * 연합군에 체포될 당시 호신용 권총을 갖고 있었는데, 그 권총이 전쟁 나기 전에 산 '''[[미제|미국제]]''' [[S&W]] [[S&W M10|밀리터리 앤 폴리스]] 리볼버였다고 한다. * [[파일:external/thumb.zumst.com/552866f8d23a4efdbd4a4e480dc57c4e.jpg]] 2016년 8월, 괴링의 금도금 [[발터 PP|권총]]이 일리노이 주의 락 아일랜드 경매 회사에 의해 경매에 부쳐졌다. 가격은 25만 달러에서 최대 40만 달러까지 예상된다고 한다. * [[미국]] 시민권자인 조카'''로 알려졌던''' 베르너 괴링은 2차 대전 중 미군에 입대해 폭격기를 몰고 독일을 폭격했다. 미군 측에서는 괴링이 혹시나 독일로 넘어가지 않을까 우려해 만약 베르너 괴링이 독일로 넘어가려고 하면 곧바로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베르너 괴링은 [[할머니]]가 살던 [[쾰른]]을 폭격할 때 잠시 망설인 것을 빼면 매우 열심히 작전을 수행했다고 한다. 이후 2012년 사망. 근데 2010년에 조사한 결과 '''헤르만 괴링과는 성씨만 똑같을 뿐 혈연관계는 아니었다'''고 한다. 미국으로 이민 온 부친 카를 괴링[* 이 사람은 [[유타 주]]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몰몬교회 정원사를 하던 사람인데, 상술하다시피 괴링 가문은 귀족만 아닐 뿐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그런 집안의 아들이 미국에 이민 와서 고작 정원사나 할 리가…]이 자기가 헤르만 괴링과 형제라고 거짓 허풍을 떤 게 와전되었다는 듯. * 후처와의 딸 에다 괴링은 병원 실험실에서 일하다가 우익단체에서 정치 활동을 했고 1970년대에 5년 동안 슈테른 잡지 저널리스트 게르트 하이데만과 동행했다. 몇 년 동안 에다는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나치 기념관에 참석했으며, 정치적 행사에 참여했지만, 나중에 그녀는 더 멀리하게 되었다. [[구드룬 부르비츠]]와 [[https://en.wikipedia.org/wiki/Albert_Speer_(born_1934)|알베르트 슈페어 유니오어]]와 같은 다른 고위 나치의 아이들과는 달리, 그녀는 제3제국이나 [[홀로코스트]]에서 그녀의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1990년대에 그녀는 인터뷰에서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그를 매우 사랑했고, 그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명백했습니다. 그에 대한 나의 유일한 기억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것들이고, 나는 그를 다른 방법으로 볼 수 없습니다. 저는 사실 미국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버지를 좋게 생각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는 나에게 좋은 아버지였습니다." [[2015년]]에는 아버지의 유산 수용과 관련된 보상을 바이에른의 주의회에 청원했지만 실패했다.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그녀의 요청을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 [[2018년]] [[12월 21일]] [[뮌헨]] 발트프리트호프에서 사망하였다. * [[파일:external/2.bp.blogspot.com/trains+goering.jpg]] [[미니어처]] [[모형]] 만들기가 취미였는데, 본인 실력도 꽤 괜찮았던 데다 풍부한 재력을 활용할 수 있었기에, 사진처럼 홀 하나를 가득 채우는 규모의 [[기차역]] 재현 등 스케일 큰 [[디오라마]] 등을 만들며 노는 것을 즐겼다. 주로 [[철도]]와 [[항공기]] 관련 모형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